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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 대표 이미지 · 피터틸, 조던피터슨 1시간 짜리 못참지

아폴로에서 우드스톡으로 3주 - 피터 틸이 원자의 세계 정체를 설명하는 방식

비트의 세계는 나아갔지만 원자의 세계는 50년간 멈췄다는 진단에서 시작해, 원인을 핵무기 내재화와 내면으로의 도피에서 찾는다. 지라르의 모방 이론으로 초월적 준거를 잃은 사회를 설명하고, 희생 언어 자체를 문제 삼는 대담이다.

아폴로에서 우드스톡으로 3주 - 피터 틸이 원자의 세계 정체를 설명하는 방식

아폴로에서 우드스톡으로 3주

TL;DR

  • 진단이 영역을 나누는데 비트의 세계에서는 진보가 계속됐지만 원자의 세계에서는 진보가 훨씬 적었다는 것이고 변곡점은 1970년 무렵이다. 가장 구체적인 지표가 속도인데 1500년부터 10년마다 더 빠른 배와 철도, 자동차, 비행기로 빨라졌는데 지난 50년간 물리적으로 더 빠르게 움직이는 것을 멈췄다.
  • 원인을 하나로 지목하지 않고 왜 질문은 과다결정된다고 인정하면서도 가장 큰 요인으로 과학과 기술이 상당히 위험하다는 감각을 꼽는다. 종착점도 명시된다. 베이컨식 과학 프로젝트가 로스앨러모스에서 헤겔적 의미로 완성되고 동시에 종결됐다.
  • 문화적 전환이 날짜로 압축되는데 1969년 7월 달 착륙 3주 뒤 우드스톡이 시작됐고 해석은 바깥 세계를 탐험하는 것에서 내면 공간으로의 이동이다. 통념도 뒤집는데 마르크스주의와 문화 마르크스주의는 함께 묶이지만 내 설명에서는 정반대라는 것이다.
  • 종교와 과학의 관계에서 역전이 지적되는데 17~18세기에는 기독교의 신이 과학 기술 프로젝트를 늦춘다고 비난받았고, 20~21세기에는 그것을 시작하고 가속했다고 비난받는다. 결론이 불변항은 기독교의 신이 항상 비난받는다는 것이다.
  • 르네 지라르를 경유한 진단이 이 대담의 축인데 첫 계명은 위를 보라는 것이고 열째 계명은 이웃의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이다. 해석이 이렇다. 위를 보는 것을 멈추면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하고, 너무 많이 둘러보면 그것은 군중의 지혜가 아니라 군중의 광기다.

Source

피터 틸 × 조던 피터슨

Source: 피터틸, 조던피터슨 1시간 짜리 못참지 — Peter Thiel × Jordan Peterson, BZCF 비즈까페, 1시간 3분 46초

Knowledge

비트의 세계와 원자의 세계

진행자가 대담의 성격을 먼저 정리한다. 실용적인 사업 측면은 별로 다루지 않았고 주로 문화적 변형의 본성을 이야기했다는 것이며 이유가 붙는다. 그의 사고가 그쪽으로 향하고 철학적 성향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핵심 명제도 요약된다. 물질 세계에서의 진보가, 디지털 세계가 아니라, 아마 1960년대부터 실질적으로 느려졌고 거기에 깊은 이유가 있다.

틸은 측정 문제를 먼저 인정한다. 아주 복잡한 측정 문제가 온갖 종류로 있는데, AI에서의 진보를 치매 연구나 알츠하이머 치료의 진보 부재와 어떻게 비교하는가.

그럼에도 시대 구분은 제시된다. 가속기가 먼저 서술된다. 르네상스와 초기 계몽주의, 17~18세기에 시작되어 19세기와 20세기 전반에 중요한 방식으로 가속됐다. 그리고 반전이 온다. 지난 50년, 아마 1970년 무렵이 변곡점으로 꼽을 수 있는 지점부터 느려졌다고 믿는다. 단서도 붙는다. 완전히 멈췄다는 뜻은 아니다.

영역 구분이 이 진단의 핵심이다. 비트의 세계에서는 진보가 계속됐고 컴퓨터와 소프트웨어, 인터넷, 모바일 인터넷, 어쩌면 암호화폐와 이제 AI다. 그런데 반대쪽이 다르다. 원자의 세계에서는 진보가 훨씬 적었다.

자기 경험이 근거로 붙는데 이 회고가 구체적이다. 1980년대 후반 스탠퍼드 학부생이었고 89년 졸업반이었다. 그리고 판정이 나온다. 당시에는 명백하지 않았지만 돌아보면 원자의 세계에 있는 거의 모든 것이 들어가기 나쁜 분야였을 것이다. 열거되는 분야가 물리학, 화학, 기계공학, 항공우주공학, 원자력공학이고 마지막은 상태가 더 나쁘다. 원자력공학은 1980년대까지 이미 사실상 금지되고 끝났다는 것을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

컴퓨터공학에 대한 평가가 신랄하면서도 흥미롭다. 그가 과학이라는 단어에 대한 의심을 먼저 밝히는데 사회과학, 정치과학, 기후과학은 열등감을 가진 사람들이 과학이라고 부르는 것이며 깊은 곳에서는 자기들이 진짜 엄밀한 과학 분야가 아니라는 것을 안다는 것이다. 그리고 같은 판정이 컴퓨터공학의 초기에도 적용된다. 수학이나 물리학, 전기공학에 있기에는 수학을 너무 못하는 사람들이 낙제해서 컴퓨터공학으로 흘러들었다. 그런데 결과가 예상과 달랐다. 이상하게도 이 분야는 작동했고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다만 경제 전반의 효과에는 회의적이다. 넓은 경제적 후생 수준에서 그렇게 잘 작동했는지는 모르겠다. 근거가 세대 비교로 제시된다. 미국의 밀레니얼 세대는 여러 면에서 베이비붐 세대 부모만큼도 잘하지 못하고 있을 것이며 이런 종류의 경제 정체나 명백한 하락을 겪는 첫 세대다. 그래서 추론이 나온다. 순진한 관점은 이 모든 진보가 어떻게든 더 성공적인 경제로 번역된다는 것인데, 번역되지 않는다면 그만큼 합산되지 않았을 것이다.

논쟁 자체가 어려운 이유도 지목되는데 이 관찰이 정확하다. 후기 근대의 특징 하나가 초전문화다. 결과가 서술된다. 암 전문가들은 5년 안에 암을 치료할 것이라고 말하는데 지난 50년간 그렇게 말해 왔다. 그리고 애덤 스미스의 핀 공장 비유가 붙는다. 후기 근대를 스테로이드를 맞은 핀 공장으로 생각할 수 있다. 결론이 이렇다. 너무 초전문화되어 전체 그림을 갖기가 극도로 어렵다.

금기가 곧 신호라는 직관

정치적 직관 하나가 별도로 제시되는데 이 방법론이 그의 다른 판단에도 적용된다. 논의가 허용되지 않는 금기 아이디어가 있으면 내 지름길은 그것이 단순히 옳다고 의심하는 것이다.

사례가 구체적으로 서술된다. 스탠퍼드 물리학 교수가 1998년 무렵 노벨 물리학상을 받고 이제 노벨상이 있으니 마침내 학문의 자유를 얻어 원하는 무엇이든 말할 수 있다는 극단적 착각에 시달렸다.

그런데 그가 고른 주제가 셋보다 더 위험했다. 안전한 금기가 열거되는데 다윈주의 의문, 줄기세포 연구 의문, 기후변화 의문이다. 그가 고른 것은 다르다. 대부분의 이른바 과학자들이 기본적으로 정부에서 돈을 훔치고 있으며 경계선상의 사기적 과학이나 점진주의적이고 값어치가 별로 없는 것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수치도 인용된다. 그의 전공인 고온 초전도 분야에서 아마 5만 편의 논문이 쓰였고 5만 중 아마 25편만이 과학을 실제로 진전시켰다는 것이다. 결말도 짧게 붙는다. 그는 곧바로 연구비가 끊기고 학생들이 더 이상 박사학위를 받을 수 없게 됐다.

그래서 방법론적 결론이 나온다. 과학의 정체 같은 아이디어가 즉시 플랫폼에서 배제된다면, 그것은 우리가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하는 아이디어다.

3주의 간격

문화적 전환이 날짜로 압축되는 대목이 이 대담에서 가장 인상적이다. 아폴로 우주 계획을 마지막 위대한 기술 과학 프로젝트로 생각하면, 1969년 7월에 달에 착륙했고 우드스톡이 3주 뒤에 시작됐다. 그리고 해석이 붙는다. 돌아보면 어떤 의미에서 그때 과학 기술 진보가 멈추고 히피들이 나라를 차지했다.

전환의 성격이 규정된다. 바깥 우주에서, 우리 밖의 세계를 탐험하는 것에서 내면 공간으로의 이동. 열거되는 현상이 넓다. 요가와 명상, 환각제, 지하실에서 비디오게임 하는 사람들, 계속된 원자화, 정체성 정치의 자기 응시.

여기서 통념을 뒤집는 구분이 나온다. 사람들이 마르크스주의와 문화 마르크스주의를 함께 묶는데, 내 설명에서는 이것들이 정반대다. 근거가 명확하다. 마르크스주의는 최소한 바깥의 객관적 물질적 경제적 실재를 주로 걱정했고 문화 마르크스주의는 아폴로에서 우드스톡으로의 이동처럼 내부 세계로 들어간 것이다. 결과도 지목된다. 경제 성장과 기본적 경제 번영에 대한 질문을 멈췄고 그것이 이 분야들의 진보 부재와도 일치했다.

원인 설명에서 그는 정직하게 유보한다. 왜 질문은 과다결정된다는 것이 내 회피 답변이라며 후보들을 열거한다. 사회가 위험 회피적이 됐거나 너무 여성화됐거나 규제와 관료제가 너무 많았거나. 마지막은 자기 성향으로 인정된다. 그것은 내가 가진 자유지상주의적 직관이다.

그런데 더 큰 요인이 제시된다. 과학과 기술의 많은 부분이 상당히 위험하다는 감각이며 최소한 군사적 맥락에서 이중 용도 성격을 가졌다. 역사가 열거되는데 나폴레옹 전쟁, 리볼버를 만든 콜트, 다이너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 1차 세계대전이고 그 효과가 규정된다. 순진한 진보 서사가 정말로 무너진 분기점이었다.

종착점이 강한 표현으로 제시된다. 베이컨식 과학 프로젝트가 로스앨러모스에서 핵무기를 만들면서 헤겔적 의미로 완성되고 동시에 종결됐다. 그리고 시차가 붙는다. 핵무기가 사회에 정말로 내재화되기까지 4분의 1세기가 걸렸을 것이다.

1970년대의 심리가 서술되는데 이 대비가 선명하다. 점점 더 많은 열핵폭탄을 만드는 이 바깥 세계에서 우리는 이걸 하고 싶지 않다. 버닝맨에서 환각제와 함께 평화롭게 있고 싶다. 다른 경로도 언급된다. 환경주의를 통해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핵심 문장이 나온다. 변화의 세계가 아니라 정체의 세계에 있고 싶은데, 변화의 세계가 이 종말론적 차원을 갖기 때문이다. 변화는 나쁜 쪽으로의 변화다.

비트의 세계가 왜 허용됐는지도 이 논리로 설명된다. 여전히 허용된 곳은 가장 무력한 곳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유가 명확하다. 비트의 세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무력하게 보였는데, 그것으로 폭탄이나 무기를 만들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격이 규정된다. 인터넷은 안전한 공간이었기 때문에 허용됐고 폭력이 담아질 수 있는 장소였다.

다만 완전한 격리는 아니라는 점도 인정된다. 트위터나 X에서 일어나는 일이 항상 거기 머무르지는 않는다. 대부분은 거기 머물지만 때때로 현실 세계로 번역된다.

종말론적 시대라는 자기 인식

1913년과의 대비가 이 진단의 핵심이다. 100년 전보다 대체로 더 느리게 진보하고 있다. 그리고 결정적 변화가 규정된다. 1차 세계대전 이전 1913년의 세계와 비교해 바뀐 큰 것은 우리가 종말론적 시대에 있다고 느끼는 것이다.

성격도 명시된다. 과학과 기술에 어두운 차원이 있고 인류가 스스로를 위해 놓고 있을 수 있는 함정이다. 그런데 균형이 유지되는데 이 인정이 눈에 띈다. 나는 그레타를 좋아하지 않고 완전한 사전예방 원칙도 좋아하지 않지만 우리에게 행성이 하나라는 그의 주장이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니다.

추상화를 거부하는 대목도 중요하다. 진행자가 논지를 일반화하려 하자 그가 막는다. 너무 추상화하고 싶지 않다. 그것은 실제로 일어난 진보의 구체적 성격이다. 열거되는 것이 구체적이다. 열핵무기를 얻었고 환경에 영향을 미칠 만큼 강력해졌고 아주 위험한 생물무기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AI에 대한 태도도 균형이 있다. 완전히 탈신체화된 초지능이 지구상 마지막 인간까지 죽인다는 이상한 그림을 반드시 믿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우려는 남는다. 무기 기술과 결합하는 자연스러운 방식들이 있고 그것이 불안하게 느껄진다.

구체적 사례가 드론이다.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분쟁에서 부상한 기술인데 문제 구조가 이렇다. 사람이 루프 안에 있는데 사람은 방해 전파에 막힐 수 있다. 그래서 해법이 나온다. 자연스러운 수정은 드론에 AI를 올려 더 자율적인 무기 시스템으로 바꾸는 것이며 그것은 불가피해 보인다. 자기 입장도 함께 밝혀진다. 친기술 성향인 나조차도 그것이 다소 불안하다고 말해야 한다.

역사의 일회성 여부를 두고 두 사람이 갈라지는 대목도 흥미롭다. 진행자가 규제가 뒤늦게 따라잡는 반복 패턴으로 설명하자 틸이 반박한다. 당신이 이야기를 하는 방식은 너무 시간을 초월하고 영원한 성격을 갖는다. 이것은 진보에서 항상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 서술은 다르다. 더 일회적이고 세계사적 성격을 갖는다.

대비가 구체적이다. 질병 치료법을 발견한 사람들이 이제 한 걸음 물러서서 더 적은 질병을 치료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고, 공장에서 인간을 대체한 기계도 단점과 노동 문제, 오염이 있었지만 좋은 쪽이 나쁜 쪽을 압도했고 빅토리아 시대에 큰 규제적 반대 운동이 없었다.

그런데 핵무기는 다르다. 그것은 정말로 다른 성격을 갖는다. 효과가 세대 교육으로까지 확장되는데 이 관찰이 인상적이다. 1950년대와 1960년대에 베이비붐 세대는 아이 때 모험 이야기가 아니라 닥터 수스로 자랐고 그것이 아동 교육을 바꾸고 인간을 형성하고 발달시키는 방식을 바꿨다.

기독교의 신은 항상 비난받는다

과학과 기독교의 관계에서 질문이 두 갈래로 제시된다. 보완으로 의도된 것인가, 즉 신의 창조를 이해하도록 장려되고 그것의 성취인가. 다른 쪽이 다르다. 대체로 의도된 것인가, 즉 신을 요구하지 않고 지상에 천국을 세우는 대안적 방법인가.

근거로 초기 근대의 기획이 언급된다. 급진적 수명 연장이 초기 근대 프로젝트의 중요한 부분이었고 벤저민 프랭클린과 콩도르세 같은 사람들이 인간 생명을 무한히 연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성격이 규정된다. 초기 근대의 많은 부분이 반성서적 성향을 가졌다.

프랜시스 베이컨에 대한 해석이 도발적이다. 베이컨은 강경한 유물론적 무신론자로 해석되어야 하며 이 훌륭한 과학적 진보를 늦추기 때문에 종교를 멈춰야 한다는 것이다. 반응도 기록된다. 최근 여러 사람과 이 베이컨 논의를 했는데 모두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후기 근대에서 위치가 뒤바뀐다. 후기 근대에서는 무신론적 자유주의자들이 이 시점에 반과학적이다. 예시가 붙는데 이 대비가 재미있다. 리처드 도킨스를 두고 초기 근대의 대표자로 생각해야 하며 1789년 이전의 화석 같다고 한다. 진행자가 받는다. 마지막 계몽주의자다. 그리고 대조 인물이 제시된다. 그레타가 더 대표적이거나 할리우드의 무신론적 자유주의자들을 생각해 보면 영화들이 모두 작동하지 않고 무서운 기술에 관한 것이다.

비난의 논리가 어떻게 바뀌었는지도 서술된다. 후기 근대에서 반기독교적 논증이 만들어지는 방식은, 그렇다 신의 잘못인데 이번에는 애초에 우리를 이 위험한 프로젝트에 놓은 것이 신의 잘못이라는 것이다. 근거로 성경 구절이 인용된다. 너희는 땅을 다스릴 것이다.

그래서 결론이 대칭으로 정리되는데 이 문장이 이 절의 핵심이다. 17~18세기에는 기독교의 신이 과학 기술 프로젝트를 늦춘다고 비난받았다. 20~21세기에는 기독교의 신이 그것을 가속하고 시작하고 계속 유지한다고 비난받는다. 판정이 붙는다. 불변항은 기독교의 신이 항상 비난받는다는 것인데, 정확히 반대라는 사실이 뭔가 아주 흥미로운 것을 알려 준다.

진행자가 제시하는 논거도 기록할 만하다. 과학이 동기 부여된 프로젝트로 시작되려면 과학적이지 않은 가정들을 해야 하고 게임이 시작되기 전의 공리들이 있으며 그것들은 신앙에 기반한 공리다. 열거되는 것이 셋이다. 우주가 이해 가능하다는 것, 인간 정신에 이해 가능하다는 것, 그 이해 가능성에 대한 성실한 탐구가 지식의 증가를 낳고 그 증가가 좋다는 것.

틸의 응답은 방향을 바꾼다. 그가 지적하는 것이 비교 문제다. 율법 중심의 유일신 전통은 이슬람과 유대교에도 있었는데, 과학 혁명이 일어난 것이 이슬람 세계가 아니라면 원인이 다른 곳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대안이 제시된다. 신학적 형이상학만이 아니라 기독교 인간학 같은 것이 아닐까. 지라르의 말도 인용된다. 사람들이 성경에서 신에 대해 알려 주는 것에 너무 집중하는데, 인간에 대해 알려 주는 것도 있어야 한다.

마녀재판은 왜 끝났는가

지라르식 설명이 구체적 사례로 제시되는데 이 대비가 이 대담에서 가장 정교하다. 질문은 마녀재판이 왜 끝났는가이다.

무신론적 과학적 설명이 먼저 제시된다. 마법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할 과학을 얻었다. 그런데 틸이 이것을 의심한다. 2025년에도 그것이 증명됐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우리가 모든 것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대안 설명이 희생양 이론에서 나온다. 어느 시점에 사람들이 집단적 희생양 만들기가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의 죽음의 한 판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구분도 정교하다. 마녀들은 그리스도처럼 절대적으로 무죄는 아니었지만 상대적으로 무죄였고 미쳐 버린 공동체였다.

그다음 연쇄가 핵심이다. 마녀들이 무죄이거나 상대적으로 무죄라는 것을 알면, 자연적 설명을 찾도록 스스로를 단련하고 강제한다. 세일럼 사례가 근거로 붙는데 설교의 변화가 흥미롭다. 초기 설교는 이 여자들이 악마와 계약을 맺었다는 것이었는데, 재판이 끝난 뒤에는 달라진다. 악마가 공동체 전체에 들어와 세일럼 전체를 사로잡았다.

그래서 과학의 기원에 대한 가설이 나온다. 고대적 상황에서는 희생양 만들기가 항상 설명이며 이 사람이 이걸 했고 저 사람이 저걸 했고 저 사람 잘못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거부하면 달라진다. 그런 설명들로는 안 된다고 말할 때, 과학적인 것을 하도록 강제될지도 모른다.

모방이 통제를 벗어났다

지라르의 심리학적 통찰이 제시된다. 인간 존재가 모방적이라는 것에 아주 깊고 중요하고 충분히 탐구되지 않은 뭔가가 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인용되는데 인간은 모방에 대한 더 큰 적성에서 다른 동물들과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뒤집기가 나온다. 다윈주의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 유인원이라고 하고 유인원은 모방한다. 그래서 우리는 유인원보다 더 유인원 같다는 점에서 유인원과 다르다.

모방의 두 얼굴이 구분된다. 좋은 쪽이 명확하다. 이것이 문화가 전달되는 방식이고 언어를 배우는 방식이며 모방 없이는 우리가 가진 문화적 구조물 같은 것이 작동하지 않을 것이다.

위험한 쪽이 층위를 달리한다. 표상 수준에서만이 아니라, 아이디어 수준에서만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욕망의 수준, 원하는 것들의 수준에서도 모방한다. 그리고 결과가 규정된다. 모두가 같은 것을 원할 때 이것은 믿을 수 없을 만큼 폭력적인 것이 된다.

고대 사회의 대응이 설명되는데 이 해석이 제도의 기능을 다시 보게 한다. 고대 사회에서 신법의 많은 부분의 요점이 어떤 의미에서 모방을 멈추고 방지하는 것이었다. 구체적 형태가 붙는다. 당신이 할 직업은 아버지가 한 직업과 같을 것이며 아버지가 제빵사면 당신도 제빵사가 될 것이다. 목적도 명시된다. 이것이 길드 체계를 만들어 모두가 서로의 목을 조르는 자유 시장 경쟁을 갖지 않게 한다.

후기 근대의 상태가 규정된다. 제도들이 풀려나면서 문화적인 것이 전혀 없기 전처럼 모방할 자유가 다시 생겼다. 그런데 결과가 양면적이다. 모방이 우리 사회를 역동적으로 만드는 것이지만 자연적 장벽이 없다.

가장 압축된 진단이 십계명 해석에서 나온다. 지라르가 가장 중요하다고 본 것이 목록의 첫째와 마지막이다. 첫째가 오직 한 신을 예배하라는 것, 당신 위에 한 신이 있다는 것이고 열째가 이웃에게 속한 것을 탐내지 말라는 것이다.

해석이 한 문장으로 압축되는데 이 문장이 이 대담의 제목이 될 수도 있었다. 위를 보는 것을 멈추면 주위를 둘러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결과가 규정된다. 주위를 너무 많이 둘러보면 그것은 군중의 지혜가 아니라 군중의 광기다.

현재 사회에 대한 판정도 이어진다. 초자연적 존재가 지배하지 않는 사회에서 사람들은 아주 많이 주위를 둘러보고 그것을 추동하는 것은 아주 건강하지 않은 지위 경쟁 게임이다. 그리고 초월적 준거의 기능이 명시된다. 초월적 준거가 있으면 모방적 경쟁 안에 있지 않다.

아인 랜드에 대한 비판도 이 틀에서 나온다. 『아틀라스』에서 나쁜 사람들은 모두 모방하는 사람들이고 중고품이며 자기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고 다른 모두를 복사하는 사람들인 반면 정말 위대한 사람들은 부동의 동자이고 아리스토텔레스적 신들이며 누구에게도 영향받지 않는다.

지라르식 반박이 간결하다. 그런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모두 깊이 사회적 맥락에서 자란다. 근거도 붙는데 이 지적이 예리하다. 아인 랜드는 아이들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지 않는데, 아이들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모방적이기 때문이다.

해법에 대한 지라르의 답도 인용된다. 모방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이 아니었다. 역할 모델을 고를 수는 있고 그리스도를 고를 수 있지만 모방적이지 않기를 고를 수는 없다.

치료에 대한 회의도 뒤따른다. 치료사와 모방적인 것에 대해 이야기하는 심리학적 접근은 오히려 더 나쁘게 만들 수 있는데, 그것에 더 집중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랄한 관찰이 붙는다. 많은 치료가 그렇듯 자기 변형으로 마케팅되고 자기 수용으로 추락한다. 지라르의 처방은 짧았다고 한다. 그냥 교회에 가야 한다.

희생 언어를 두고 갈라지다

대담 후반부의 쟁점이 희생이다. 여기서 두 사람이 확연히 갈리는데, 틸이 자기 입장을 밝힌다. 나는 개조되지 않은 지라르주의자임을 자백한다. 시점도 특정된다. 지라르는 생애 말에 희생에 더 열려 있었을 텐데, 나는 더 범주적으로 회의적이었던 70~80년대의 지라르에 머문다.

구체적 사례로 학계 이야기가 나온다. 우파 학자를 양성해 체계에 침투시키자는 20년간의 논쟁에 대해 그는 반대한다. 근거가 이렇다. 박사학위를 가진 우파 학자가 될 젊은이의 관점에서 완전히 고용 불가능해질 것이라면, 그것은 합리적 희생이 아니라 아주 어리석은 선택이다.

그리고 진행자의 대학 사직을 예로 들며 재해석한다. 틸의 표현이 이렇다. 나는 그것을 반희생적 움직임으로 서술하겠다. 희생적 움직임이 무엇인지도 대비된다. 거기 정규직 자리가 있고 불행할 수 있지만 더 큰 선을 위해 머물러야 한다는 것.

피터슨의 반론이 명확하다. 나는 내 혀를 희생하기를 거부했고 그래서 희생한 것은 내 직업과 임상 경력이었다. 그리고 기독교적 근거를 붙인다. 진리를 향한 말이 질서를 세운다는 것이 기독교의 주장이다.

그런데 틸은 조건을 붙이며 물러서지 않는다. 직업을 희생하고 완전히 고용 불가능해지고 경제적 전망이 없었다면, 자기를 표현하기 위해 직업을 희생했다고 서술할 수 있지만 아무도 듣지 않는다면 그것은 꽤 비합리적인 일일 수 있다. 그리고 실제 선택을 평가한다. 훨씬 큰 청중에 도달하는 데 집중한 것이 합리적이었고 좋은 결정이었다.

가장 흥미로운 재해석은 학계의 가치 체계를 거부한 것으로 보는 대목이다. 당신은 그들의 가치 체계가 당신을 통제하게 두지 않았다. 그 가치 체계가 무엇인지도 명시된다. 학계보다 중요한 것이 없다는 것, 이것이 정말로 중요한 세계라는 것, 여기서 싸워야 한다는 것.

피터슨의 응답이 균형을 유지한다. 내가 얻은 것이 잃은 것보다 훨씬 컸다. 그렇다고 잃은 것이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리고 성경의 역설이 제시된다. 아브라함과 이삭 이야기에서 신이 아들을 희생하라고 부르고 아브라함이 그럴 의지가 있었지만 그 결과로 아들을 돌려받는다.

이삭의 신앙

이 대담의 결말이 성경 해석에서 나오는데 관점이 신선하다. 틸은 구약을 신약을 통해 해석해야 한다는 전제를 밝힌 뒤 신약의 구절을 든다. 그리스도가 어린아이 같은 신앙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구체적 질문을 던진다. 특별히 주목할 만하고 본받을 만한 것으로 강조되는 어린아이의 신앙이 있는가. 답이 그의 해석이다. 구약에서 신앙이 서술되는 아이가 실제로 한 명 있는데 우리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는 것 같고 그것은 이삭이다.

근거가 서사에서 나온다. 산을 올라가면서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신이 다른 것을 제공할지도 모른다는 허구의 이야기를 하고 이삭은 그것을 그냥 믿는다.

두 신앙이 대비되는데 이 판정이 강하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희생을 해야 한다고 믿는다. 그것은 키르케고르를 너무 많이 읽은 성인의 망상적 신앙이다. 반대쪽이 다르다. 이삭의 것이 진정한 기독교 신앙인데, 신이 희생이 필요하지 않은 방법을 찾아낼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신학적 결론이 붙는다. 신은 폭력적인 신이 아니다. 폭력은 신에게서 오지 않는다. 그는 사랑의 신이다. 희생 없이 이것을 할 방법이 있다.

기존 해석 전통에 대한 지적도 있다. 아브라함의 신앙에 대해 끝없이 많이 쓰였고 아브라함이 신앙을 가진 상징적 인물로 여겨진다. 그런데 그의 결론은 다르다. 내가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방식으로는, 그가 나에게 이삭의 신앙을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다고 이해한다.

마지막으로 그가 왜 희생 언어를 꺼리는지가 밝혀진다. 그는 그리스도의 물리적 부활을 역사적으로 일어난 사건으로도, 약속으로도 믿는다고 말한 뒤 논리를 제시한다. 그리스도를 따르면 온갖 나쁜 일이 일어날 수 있지만 영혼을 구하고 영생을 얻는 데 대한 합리적 거래다.

그래서 성격 구분이 나온다. 영혼을 구하는 것과 영생의 맥락에서 생각하면, 그것을 희생이라고 부를 수 있지만 아주 다른 성격을 갖는다. 대안 해석도 대비된다. 이것들이 그냥 어떤 융식 원형 이야기라고 생각하면, 희생 자체를 정말 높은 값어치로 두게 된다. 결론이 짧다. 정통 기독교 메시지를 아주 반희생적이고 비희생적으로 해석하겠다.

🔗 최근 게시분과의 대조

피터 틸 × 피터슨최근 노트
비트는 나아갔고 원자는 멈췄다론즈데일 대담 “원자의 세계 50년 정체” — 같은 진단, 같은 화자
금기 아이디어는 옳다고 의심한다Dan Luu “품질 실명” — 말할 수 없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초전문화로 전체 그림을 못 본다Guldmann “통치 문제로 위장한 기술 문제”
위를 보지 않으면 주위를 둘러본다하라리 “신뢰가 인간에게서 AI로 옮겨갔다” — 준거의 이동
AI를 드론에 올리는 것이 불가피해 보인다하라리 “루프 위의 인간” / KISDI “여론 왜곡 대비”
변화는 나쁜 쪽으로의 변화지트론 “2027년 붕괴” — 종말론적 프레임의 현재판

특히 같은 화자의 론즈데일 대담 노트(8/26)와 이어서 읽으면 좋다. 그쪽에서 맨해튼 지하철 마일당 10억 달러와 규제 위원회가 50년간 원자로 설계를 승인하지 않았다는 사례로 정체를 말했는데, 이 대담은 그 정체의 문화적·종교적 원인을 다룬다. 사례와 설명이 짝을 이룬다.

그리고 하라리 노트와 뜻밖에 겹친다. 하라리는 신뢰가 인간에게서 AI로 옮겨갔다고 했고, 틸은 초월적 준거를 잃으면 서로를 둘러본다고 한다. 둘 다 준거점의 이동을 문제로 보는데, 한쪽은 기술 쪽으로, 다른 쪽은 수평 쪽으로 옮겨갔다고 본다.

더 생각해보기

  • 속도가 50년간 멈췄다는 지표가 이 진단에서 가장 검증 가능하다. 다만 이동 속도만으로 원자의 세계 전체를 대표할 수 있는지, 다른 물리적 지표에서도 같은 정체가 보이는지 따로 확인할 값어치가 있다.
  • 금기 아이디어는 옳다고 의심한다는 방법론은 강력하지만 반증이 어렵다. 노벨상 수상자 사례처럼 실제로 억압된 참인 주장도 있고, 억압될 만한 틀린 주장도 있으므로 금기의 종류를 구분하는 기준이 필요하다.
  • 아폴로에서 우드스톡까지 3주는 인상적인 서사인데, 상관과 인과를 저자도 구분해 두었다. 문화 전환이 정체의 원인인지 같은 원인의 다른 결과인지가 열려 있다.
  • 마르크스주의와 문화 마르크스주의가 정반대라는 구분이 논쟁적이지만 유용하다. 외부의 물질적 조건을 다루는 것과 내면의 정체성을 다루는 것이 실제로 다른 정치를 낳는다면, 둘을 묶어 부르는 관행이 논의를 흐린다.
  • 기독교의 신이 늦춘다고 비난받다가 가속했다고 비난받는다는 대칭 관찰이 이 대담에서 가장 재미있다. 비난의 내용이 반대인데 대상이 같다면, 실제 쟁점이 신학이 아니라 다른 곳에 있다는 함의가 된다.
  • 위를 보지 않으면 주위를 둘러본다는 진단이 지위 경쟁을 설명하는데, 처방은 교회에 가라로 끝난다. 종교적 준거를 공유하지 않는 사회에서 같은 기능을 하는 대안이 무엇인지가 공백으로 남는다.
  • 아브라함이 아니라 이삭의 신앙이라는 해석이 신선하다. 희생을 감수하는 신앙과 희생이 불필요할 것이라 믿는 신앙은 실천이 완전히 달라지므로, 이 구분은 신학 밖에서도 쓸 수 있다.
  • 두 사람이 같은 사실(피터슨의 사직)을 희생 vs 반희생으로 정반대로 서술하는 대목이 인상적이다. 같은 행동을 어떤 언어로 기록하는지가 이후 다른 사람의 선택에 영향을 준다면, 서사의 선택 자체가 실천적 문제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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