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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향은 어디서 오는가 - 크리스틴 웹버가 AI 시대에 다시 묻는 안목의 기원

취향은 제작하다 실패하는 동안 자라는데 AI가 그 구간을 대신하면 순환의 한쪽이 끊긴다는 논증

취향은 어디서 오는가 - 크리스틴 웹버가 AI 시대에 다시 묻는 안목의 기원

취향은 어디서 오는가

TL;DR

  • 웨버는 AI 옹호론의 익숙한 반박에서 출발하는데 AI가 나쁜 예술을 만든다면 문제는 도구가 아니라 사용자의 취향이라는 것이다. 취향이 중요하다는 데 동의하므로 반박을 반쯤 수용하되 질문을 한 칸 앞으로 되돌린다. 그러면 그 취향은 어디서 오는가.
  • 웨버 자신의 이력이 근거로 제시된다. 오래 그림을 그렸고 음악을 만들었고 프로그램을 썼는데, 그 과정에서 얻은 것은 결과물이 아니라 감각이었다. 무엇이 좋은지 알아보는 능력은 무언가를 만들려고 애쓰다가 실패하는 동안에 자란다는 것이다.
  • 핵심 주장은 순환의 절단인데 취향은 제작에서 오고 제작은 취향을 기른다는 것이다. 그런데 AI가 제작 단계를 대신하면 이 순환의 한쪽이 끊긴다. 결과물은 계속 나오지만 그것을 판정할 감각은 더 이상 자라지 않는다.
  • 그래서 도구 논쟁의 층이 이동해 문제는 AI가 만든 것의 품질이 아니라 AI를 쓰는 사람이 앞으로 품질을 알아볼 수 있게 되는지가 된다. 웨버는 이 점에서 두 세대를 구분한다. 이미 취향을 기른 사람에게 AI는 도구이지만, 아직 기르지 못한 사람에게는 기를 기회 자체를 치운다.
  • 결론은 처방이 아니라 경고에 가깝다. 취향을 가진 사람이 AI로 좋은 것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은 참이지만, 그 말이 다음 세대에게도 참이려면 그들이 취향을 기를 경로가 남아 있어야 한다.

Source

But where does taste come from? — Christine Lemmer-Webber, dustycloud.org

[dustycloud.org/blog/but-where-does-taste-come-from](https://dustycloud.org/blog/but-where-does-taste-come-from/)

Knowledge

반박을 먼저 받아들이는 방식

이 글은 AI 비판론에 흔히 돌아오는 반박에서 출발한다. AI로 만든 결과물이 형편없다고 말하면, 그것은 도구의 문제가 아니라 그 도구를 쓴 사람의 문제라는 응답이 돌아온다. 좋은 취향을 가진 사람이 쓰면 좋은 것이 나온다는 것이다. 웨버는 이 반박을 곧바로 기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절반을 인정한다. 취향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는 데는 동의하기 때문이다.

동의의 이유가 자기 경험에서 나온다. 웨버는 오래 그림을 그렸고 음악을 만들었고 소프트웨어를 만들어 왔다. 그 이력에서 배운 것은 특정 기법이 아니라 판정하는 감각이었다. 어떤 선이 어색한지, 어떤 화음이 게으른지, 어떤 코드가 나중에 문제를 일으킬지를 알아보는 능력이다. 이 능력이 없으면 도구가 아무리 강력해도 결과물이 좋아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반박은 옳다.

그래서 논쟁의 초점을 옮긴다. 취향이 중요하다는 명제를 받아들인 다음, 그 명제에서 자동으로 따라 나온다고 여겨지는 결론을 검사한다. 취향이 중요하다는 사실은 AI를 옹호하는 근거가 되는가, 아니면 오히려 문제의 위치를 정확히 지목하는 근거가 되는가. 웨버는 후자라고 본다.

취향은 실패하는 동안 자란다

핵심 관찰은 취향의 발생 경로에 있다. 취향은 감상만으로는 충분히 자라지 않는다. 좋은 것을 많이 보는 것도 도움이 되지만 결정적인 부분은 직접 만들어 보다가 실패하는 경험에서 온다. 무언가를 의도했는데 손에서 나온 결과가 의도와 다를 때, 그 간격을 인식하는 순간에 감각이 생긴다.

이 과정은 지루하고 비효율적이다. 웨버가 그림을 배울 때 그린 수많은 실패한 그림들은 그 자체로는 아무 가치가 없었다. 하지만 그 그림들을 그리는 동안 무엇이 잘못됐는지 보는 눈이 만들어졌다. 결과물은 버려졌지만 감각은 남았다. 제작 과정의 진짜 산출물이 작품이 아니라 만든 사람의 변화였다는 뜻이다.

여기서 AI 도구와의 충돌 지점이 드러난다. AI의 가치 제안은 정확히 이 지루하고 비효율적인 구간을 제거하는 데 있다. 실패하는 시도들을 건너뛰고 곧바로 그럴듯한 결과에 도달하게 해 준다. 효율의 관점에서는 개선이지만 취향의 발생 경로에서 보면 감각이 자라던 바로 그 구간을 삭제하는 것이다.

순환의 한쪽이 끊긴다

웨버가 그리는 구조는 순환이다. 취향이 있어야 좋은 것을 만들 수 있고 만드는 과정이 취향을 기른다. 이 두 방향이 서로를 먹여 왔다. 초보자는 빈약한 취향으로 형편없는 것을 만들고 그 형편없음을 인식하면서 취향이 자라고 자란 취향으로 조금 나은 것을 만든다. 이 반복이 숙련의 실제 내용이었다.

AI가 제작을 대행하면 이 순환의 한쪽 화살표가 끊긴다. 취향이 결과물의 품질을 결정하는 방향은 남아 있다. 좋은 취향을 가진 사람이 AI를 지휘하면 실제로 나은 것이 나온다. 하지만 제작이 취향을 기르는 반대 방향은 작동하지 않는다. 만드는 노동을 하지 않았으므로 그 노동이 주던 감각의 성장도 없다.

이 비대칭이 세대 문제를 만든다. 이미 순환을 여러 바퀴 돌아 취향을 축적한 사람에게 AI는 순수한 도구다. 판정할 능력이 있으므로 결과물을 걸러 낼 수 있고 지루한 구간을 건너뛰는 것이 손실이 아니다. 그러나 아직 순환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에게 AI는 도구가 아니라 우회로다. 취향을 기를 기회 자체가 치워진다.

논쟁의 층을 옮긴다

이 관점에서 보면 AI 산출물의 품질을 두고 벌이는 논쟁은 초점이 어긋난 것이 된다. 모델이 좋아져서 결과물이 더 그럴듯해지는 것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 오히려 악화시킨다. 결과물이 그럴듯할수록 판정 능력 없이도 통과되는 것이 늘어나고 판정 능력을 기를 동기와 기회는 더 줄어든다.

물어야 할 질문은 결과물이 좋은가가 아니라 이 도구를 쓰는 사람이 앞으로 좋은 것을 알아볼 수 있게 되는가다. 웨버는 취향을 가진 사람이 AI로 좋은 것을 만들 수 있다는 명제를 부정하지 않는다. 부정하는 것은 그 명제가 지속 가능하다는 가정이다. 취향을 가진 사람들은 AI가 없던 세계에서 취향을 길렀다. 그 조건이 사라진 뒤에도 같은 명제가 성립할 이유가 없다.

처방보다 조건에 대한 진술

이 글은 AI를 쓰지 말라고 말하지 않는다. 웨버 자신이 도구를 만들고 쓰는 사람이고 취향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쪽에 서 있다. 다만 취향의 중요성을 근거로 AI를 옹호하는 논증이 자기 발밑을 무너뜨린다는 점을 지적한다. 취향이 중요하다면 취향이 생기는 조건도 중요하고 그 조건은 제작의 고통이었다.

그래서 결론은 조건에 대한 진술이 된다. 취향을 가진 사람이 AI로 좋은 것을 만들 수 있다는 말이 다음 세대에게도 참이려면, 그들이 취향을 기를 경로가 어딘가에 남아 있어야 한다. 그 경로를 어떻게 남길지는 이 글이 답하지 않는다. 다만 그것이 답해야 할 질문이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더 생각해보기

  • 취향이 제작 경험에서 온다면, AI 시대의 교육은 결과물을 만드는 훈련이 아니라 판정하는 훈련을 별도로 설계해야 하는가.
  • 감상만으로 기를 수 있는 취향과 제작을 통해서만 기를 수 있는 취향은 어떻게 다른가. 비평가와 창작자의 안목 차이가 그 답을 보여 주는가.
  • 이미 취향을 축적한 세대와 그렇지 않은 세대 사이에서 AI가 만드는 격차는 시간이 지나면 좁혀지는가, 벌어지는가.
  • 실패하는 경험이 감각을 기른다면, AI에게 일부러 나쁜 결과를 내게 해서 판정 훈련을 시키는 방식은 대체가 될 수 있는가.
  • 취향이 필요 없어지는 영역과 여전히 필요한 영역은 무엇으로 구분되는가.
  • 제작의 지루한 구간을 없애는 것이 손실이라면, 어떤 지루함은 남겨야 하고 어떤 것은 없애도 되는가.
  • 취향의 순환이 끊긴 자리에 다른 순환이 생길 수 있는가. 예를 들어 프롬프트를 다듬는 반복이 그 역할을 하는가.
  • 이 논증은 AI에만 적용되는가, 아니면 계산기·워드프로세서·컴파일러에도 같은 구조로 적용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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